로마유적

[로마유적]마크따르와불라레지아

monsieur 2010. 12. 4. 14:08

발은 불라레지아와 솀투를 목표로 했지만 결과적으로 불라레지아에서 솀투대신 마크따르까지 가게 되었고 튀니스는 밤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불라레지아는 로마시대에 지하도시로 알려진 곳이다. 귀족들의 여름 별장이 이곳에 있다.

유적지는 아담하지만 둥그런 산밑에 자리잡고 있고, 생활에 쓰이는 유물들이 많아서 볼만하다.

튀니스에서 가깝고 가기도 쉽다. 120킬로 정도면 가까운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실 가까운 유적지는 카르타고나 우드나, 투불보 마주스, 우티카등이고 이곳은 서쪽 끝이다.

튀니지의 북쪽으로 여행할때 출발지가 되는 밥사둔 버스터미널에 가서 버스나 루아지로 젠두바까지 간 다음에 거기서 택시를 타고 유적지로 들어가면 된다.

아침 7시에 아인드라함행 버스가 있는데 그 버스가 베자와 젠두바를 거쳐간다.

그 버스를 놓치거나 더 일찍 가려면 루아지를 이용하면 되는데 난 새벽같이 출발했기 때문에 루아지를 탓다.

30분을 기다려 6시쯤 출발한 아인드라함행 루아지 기사는 매우 친절해서 젠두바에 내리지 말고 불라레지아 입구까지 태워준다고 한다.

당연히 좋았지만 입구라며 아인드라함가는 길 중간에 내려보니 유적지까지는 2킬로쯤 더 들어가야 된다.

삼거리에서 검문을 하고 있던 가르드 네셔널이 불라레지아로 들어가는 차를 잡아서 나를 태워준다.

 

 

튀니지에서는 가르드 내셔널이 절대권력과 마찬가지다.

국경수비대쯤으로 봐야하는데 서쪽과 남쪽의 국경지대에서는 지나가는 사람이나 차를 잡고 검문하기도 하고 지역의 재판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간에 문제가 생기면 경찰이나 법원을 가는게 아니라 가르드 내셔널에게 적절한 판단과 처분까지 맏기기도 한다.

한마디로 조선시대의 관아라고 해도 무방하다. 경찰과는 달리 생활에 파고 들어서 원리주의자나 불온한 사람들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가장 중요한 건 국경이 거의 개방되어있으니까 외국인을 감시하는게 될 것이다.

아무튼 튀니지에서 만난 가르드 내셔널들은 권력을 가진 자에게서 나오는 여유로 느긋하고 정확하게 사람들을 대했고 사람들은 한 마디의 불평이나 대꾸 없이 그들의 지시에 따랐다.

한적한 시골길을 할아버지가 모는 차를 타고 손자와 양과 염소와 털털거리면서 가는것도 여행을 풍성하게 해주는 예깃거리다.

 

 

 로마인의 여름휴양도시 불라레지아

라레지아에 도착하자 먼저 채석작업을 하는 산이 보였고 길맞은편은 문 닫은 박물관과 매점이다.

매점쪽에서 표를 끈고 입구로 들어가니 마침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보인다.

입구부터 로마의 공중목욕탕이 있고 작은 극장과 주거지의 유적이 알차게 있다.

 

 

 

비가 자주 내리는 봄이어서 구름이 몰려오고 바람도 제법 불지만 밝은 초록색의 풀과 활짝핀 꽃들이 우중충한 분위기를 바꿔준다.

지하에 뭍혀있던 유적이고 모자이크가 많아서 그런지 계속 발굴과 정비작업을 진행하고 있고 곳곳에 아무렇게나 돌과 기둥, 변기의 뚜껑들이 놓여있었다.

 

특히 유적에 모자이크들이 많이 보였는데 이곳이 별장지라서 다른곳보다 부유함을 상징하는 모자이크가 더 많이 쓰인것 같다.

뛰어난 모자이크들은 튀니스의 바르도 박물관에 떼어서 전시하고 있는데 남은 모자이크의 부분도 정교함과 화려함을 느끼게한다.

불라레지아를 상징하는 땅 밑의 집(Maison de la Amphitrite, 앙피뜨리떼는 바다의 여신)은 보수공사를 하는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놓았다. 이걸 보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실망이다.

주변에 있는 표지판에는 사냥(꾼)의 집(Maison de la Chasse) 이라고 써있는데 수렵하는 모자이크가 나와서인지 이곳에서 여름에 귀족들이 사냥을 해서인지 설명은 없다. 대신 주변에 있는 집들을 꼼꼼히 보고 모자이크들도 사진을 찍었다.

 

 

이곳에선 세례당의 침례용 욕조는 판판한 돌을 십자모양으로 배치해 놓은 것이라서 신기했다.

스베이틀라의 화려하고 부드러운 유선형의 모자이크 욕조와는 차이가 났다.

 

이제 솀투로 가려고 한다. 유적지와 함께 군사박물관이 있다고 하니 궁금하다.

그런데 매점에서 전화해서 부른 택시기사가 솀투로 가고 싶다는 내게 바가지를 씌우려고 한다.

12킬로면 먼거리가 아닌데 7만원 정도를 달라는 것이다. 왕복하면 그 정도 된다나..

아! 7만원 80디나르면 튀니스에 기사가 300킬로에 달하는 캡본을 한 바퀴 돌아준다는 돈인데, 50디나르면 반나절 택시를 대절하기도 하는데, 그럴수는 없는 일이다.

아직 이른 시간이니 번쩍하고 마크따르가 떠올랐다. 케프로 가서 마크따르나 안되면 두가를 한 번 더가보리라.

비와 모래에 엉망인 시가를 걸어서 케프행 루아지를 탄다.

마침 루아지가 바로 출발해서 케프에 도착했다. 케프는 언덕위에 있는 멋진 도시로 서쪽 내륙에 중심이 되는 큰 도시다.

비탈진 곳에 늘어서 있는 루아지 터미널에서도 마크따르로 가는 루아지는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만 출발 할 수 있었다.

 

두바에서 케프로 오는 산길도 아주 좋았는데 이곳은 흐린 날씨에 비도 간간이 오는데 산위에 소나무 숲을 헤치고 가는 길이다.

중간중간 울진의 계곡처럼 큰 계곡에 흙이 사정없이 흘러내리는게 장관인데 조금만 비가 더오면 길이 무너져 내릴까 위태롭다.

케프에서 마크따르로 오는 길은 더 멋있다. 나무가 별로 없어진 높은 산길을 계속 넘어서 양떼를 보고 졸다보니 어느새 황량한 언덕이 나오고 집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마크따르에 도착했다.

알고보니 마크따르가는 사람은 나뿐이고 대부분 실리아나로 가는데 조금 돌아서 나를 태워준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기사에게 항의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바로 마크따르의 유적지로 들어간다.

 

 

 누미디아의 관문 마크따르

크따르는 유명하긴한데 교통이나 편의시설이 부족해서인지 잘 소개되지 않는곳이다.

하지만 튀니지 관광안내도에 나오는 개선문과 유적 둘 다 마크따르의 것일만큼 훌륭한 유적이었다.

높이도 해발 900미터가 넘는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좁은 통로처럼 생긴 길을 계속 내려가면 실리아나가 나온다.

실리아나는 그 유명한 로마와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대회전을 펼쳤던 자마 평원에 위치한 도시다.

즉 마크따르는 튀니지지역의 동쪽 평원과 서쪽 산악지대의 경계가 되는 관문도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카르타고 멸망뒤에도 유그르타의 항전이 끝날때 까지 한참을 유지했던 누미디아는 수도인 두가나 이곳 마크따르처럼 높은 곳에 도시를 세웠고 로마는 그자리에 화려한 로마식 도시를 재건했다.

두가에 있는 마시니사 영묘처럼 이곳에도 유적지 바로 옆에 누미디안 영묘가 있어 누미디아 시대에도 번영했던 도시였음을 말해준다.

 

 

마크따르 유적지 안에는 간략히 유적지를 소개한 박물관이 있고 이 뒤로 바로 로마의 가도가 이어진다.

부드러운 산의 정상부에 위치해서 한 눈에 모든 유적을 다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넓고 크다.

제일 높은 곳에 있는 트라야누스 개선문은 2세기초에 세워진것으로 튀니지 안내지도에도 나온다. 규모도 튀니지에서 가장 큰것으로 생각된다. 유적 바로 앞에도 개선문이 있는데 5세기에 세워진 비잔틴양식의 문이다.

 

  

목욕탕과 극장도 유별나게 크다.

특히 유명한 건 학교의 유적으로 회랑의 기둥과 나무의 모양이 인상적이고 정교하게 돌에 세겨놓은 조각들이 하나하나가 예술품이다.

튀니지의 유적들은 어느곳이나 한결같이 아무렇게나 방치된것 같아 안타깝다.

왠만한 돌을 주워다가 박물관에 놓아도 다 그럴듯하고 훌륭할것이다.

기억이 많이 나는 것이 헤이드라의 유적들과 천마상, 이곳 마크따르의 정교한 조각들이다.

2~4세기라고 해도 1700년이 넘는 우리나라로 하면 가야도 멸망하지 않은 백제부흥기 삼국초기다.

차이가 있다고 해도 로마문명의 기술력과 기타 문명의 기술력은 너무 차이가 심하게 난다.

이곳도 아랍점령후에 기하학적인 측면에서는 발전했어도 규모와 정교함과 예술적 표현은 오히려 후퇴한 듯 보인다.

한국의 문화유산은 이에 비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되는데..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외국사람들에게 한국 관광을 오게 하려면 문화유산으론 어렵겠다는 생각이다.

 

 

다시 마크따르를 계속 둘러본다.

원형경기장은 엘젬이나 콜롯세움처럼 큰 돌로 화려하게 지은것이 아니라 입구만 잘 다듬고 벽은 작은 돌과 흙을 이용해서 쌓았다.

엘젬 옆의 작은 엘젬도 이와 같은 작은 돌을 이용했는데 규모에 따라서 사용되는 석재나 건축법이 달랐을것 같다.

또 이곳이 높은 곳에 있어서 큰 돌을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동부 해안의 지역처럼 많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마도 마크따르는 지금이 로마시대보다 더 적은 인구가 사는 곳이되었을지 모르겠다.

멀리 1000미터가 훌쩍넘는 산들도 동네의 야트막한 언덕으로 보이고 누미디안 영묘도 동네아이들의 불장난으로 그을려 있다.

 

 

시간도 오후 4시 반이 넘어서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루아지 터미널에 가니 마크따르를 벗어나는 차가 없다.

하기야 이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것도 아니고 실리아나까지라도 가면 좋겠지만 8명이아니라 최소한 4명은 되어야 출발한다는 루아지는 나와 청년하나 뿐이다.

버스는 4시 반에 떠났고(나중에야 6시에도 버스가 있다는걸 알았다) 이제 이곳을 벗어날 길이 막막하다.

까이로완에서 경찰로 근무한다는 사람이 사방으로 물어보아도 워낙 사람이 적은 곳이고 한적한 시간이라서 방법이 없다.

돈을 더 준다고 해도 루아지 기사는 이곳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가겠다는 테세다.

이제 해가 마을 뒤 서쪽으로 넘어가고 호텔도 없을 것 같은 이곳에서 숙소를 알아봐야 하나 하고 생각할때쯤 루아지 기사가 차에 앉아있는 나를 부른다. 마침 튀니스까지 가는 세명이 있어서 나까지 네명이 튀니스로 바로 갈 수 있게 되었다. 행운도 필요하다.

안그랬으면 남의 집 신세를 지거나 하룻밤에 3디나르(3천원)한다는 이름모를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 뻔 했다.

튀니지에서 하루에 10디나르 하는 곳까지는 자봤지만 밥도 주는 3디나르 숙소는 어떤곳일까 궁금하다.

아인드라함에는 2디나짜리 깔끔한 게스트 하우스도 있다고 하는데..

아무튼 어두워지기 전에 운좋게 튀니스로 바로 올 수 있게 되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더 늦은 시간에 버스도 있고 마크따르에는 시설은 별로여도 호텔도 있다고 한다.

 

 

아지가 마크따르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경치가 더 좋다.

먼저 도시의 관문처럼 기묘한 산봉우리를 돌아서 용틀임하는 암반이 끝없이 산아래로 향해 있는 길을 계속 내려간다.

계곡쪽에는 흰색 가드레일이 설치되어있고 저 멀리에는 실리아나자마평원이 펼쳐져 있어서 흡사 바다를 향해 내려가는 기분이다.

실리아나의 평원에 다다르자 남쪽으로 1300미터에 달하는 산이 구름을 머리에 이고 대평원의 끝에 웅장하게 서있다.

다음에 자마를 찾아 갈때에도 이곳을 지나야 하니 그때 사진을 찍어야 겠다.

차가 실리아나를 지나 산을 다시 넘고 호수같은 것을 지나서 튀니스 근처까지 오는동안 자다가 오다가를 반복했고 실리아나 쯤에서 해가 졌다.  튀니스 근처에 차가 많아질때 쯤 우뚝 서있는 수도교들이 기억난다.

차고지가 없는 루아지 기사가 튀니스 외곽에 아무데나 나를 내려주긴 했지만 도시의 빛을 보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하룻만에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너무 멀리까지 갔다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