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와 이슬람교
튀니지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라고 자랑 하지만 인구의 98%이상이 이슬람교이고 이슬람교인을 타종교로 개종시키는 행위는 법으로 금하고 있다. 때문에 천주교나 유대교 교회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인에는 해당하지 않고 기독교는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활동한다. 이들에게 이슬람교는 사막의 거친 환경을 받아들여야 하듯 그냥 삶자체이고 종교를 포기하면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절대적인 것이다.
생활의 많은 부분이 이슬람교의 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서양과 마찬가지로 일요일에 쉬고(이슬람에서는 금요일이 휴일이다) 젊은이들은 개방적이며 서양의 것을 따라가고 있지만 아직도 한달간의 라마단에 금식을 행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부르기바가 금지했던 학생의 히잡은 오히려 부활하려고 하는 조짐이다.
종교가 원래 정치와 관련이 크지만 이슬람의 경우 더욱 강력하게 작용을 한다. 독재체제인 튀니지는 개방노선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슬람 원리주의를 강하게 통제하고 온건한 순니파에 속하지만 역시 종교를 독재를 강화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초대대통령인 부르기바는 이미 재임시절부터 자신의 묘역을 이슬람의 술탄처럼 거대하게 조성했다. 부르기바의 출생지인 모나스티르에는 거대한 묘지가 있는데 마우솔레움(영묘)이라 부르며 일반인들이 찾는 곳으로 만들었다. 이곳을 방문해 보니 마치 김일성이 모택동의 묘를 연상시키는 석관을 무덤가운데 놓고 뒷편은 전시관을 만들어 놓았다.
현재의 대통령인 벤알리도 카르타지에 커다란 궁을 짓고 살고 있고 튀니스에서 카르타지로 가는 길목의 바닷가에 커다란 영묘를 만들고 있다. 현지인에게 들은 것이지만 그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것 같았다.
튀니지 어딜가나 볼 수 있는 지명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부르기바이고 하나는 세트노방브르(11월 7일)다. 1987년 11월 7일에 벤알리 대통령이 무혈 혁명으로 정권을 잡았는데 튀니지의 공식 휴일이다. 어느도시나 시가의 중심가는 부르기바 대로이고 중요한 도로는 세트노방브르 거리다. 또 체육관, 공공건물 심지어 배까지 붙일 수 있는 곳은 모두 부르기바와 세트노방브르가 있다.
현지인이 아니어서 어떤 기분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외국인으로서 보면 30년이나 독재를 한 부르기바는 튀니지 사람누구나 국부(國父)로 인정할만큼 훌륭한 사람이고 존경할만한 사람이다. 지금의 대통령이 80이 넘은 부르기바 밑에서 정권을 빼았았지만 부르기바는 이후 13년간이나 북부의 따바르카라는 휴양도시에서 살다가 죽었다. 따바르카의 중심가에는 강아지와 같이 있는 부르기바 대통령의 동상이 있는데 독일에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도 부르기바 동상에서 찍은 사진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것을 보고 부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현재의 대통령 벤알리는 최근에 87%가 넘는 득표로 5선에 성공했는데 어딜가나 그의 사진이 걸려있고 본중에 가장 하이라이트는 자구안의 물의 신전에 있는 사진이었다. 누군가는 보자마자 해리포터라고 소리친 사진은 마치 사제복을 입고 자신이 물의 신전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과 같은 분위기를 준다.
벤알리 대통령의 사진은 대체로 가슴에 손을 가로얹고 있는데 이는 존경한다는 뜻을 담은 이슬람의 인사법이다.
독재자이지만 부드럽게 웃으며 이슬람의 전통 인사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외국인인 나도 자꾸 볼수록 친근한 느낌이다.
나에게 동양인이라고 합장하면서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벤알리처럼)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약간 옆으로 숙이면 모두들 기쁨이 가득해서 입이 벌어지며 아주 좋아한다.
정치인들을 이슬람의 지도자나 제사장으로 동일하게 신격화 하면서 대중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데 길에서 만난 젊은이들도 자기가 벤알리의 아들이라고 할 정도로 사회는 개방되었고 지식인은 넘쳐난다. 그럼에도 깊은 종교의 뿌리는 사람들을 그 틀안에서 생각할 수 밖에 없게 하는 것 같다. 그런 점을 잘 알기 때문에 아직 이슬람교를 통한 대중의 통제는 유효하게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튀니지에서 유대교를 예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제르바에는 유대교 교회인 시나고그도 있고 제르바 곳곳에 유태인이 아직도 모여 살고 있다.
튀니지내의 유태인은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에는 2만명에 달했는데 지금은 수백명에 그친다고 한다. 아랍과 가장 심한 대립각을 세우는 유태인이지만 이산(디아스포라)후 거의 2천년에 달하는 세월을 살았는데도 자신들의 혈통을 유지하는 것도 대단하고 별도의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이라도 허용하는 아랍인들도 머리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게다가 한때 PLO의 본부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튀니지로 옮겨온 적도 있을 만큼 튀니지가 이스라엘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다. 급기야 2004년에는 유태인 거주지에 폭탄테러까지 일어나서 2명이 사망했다. 그때문인지 그전부터인지 몰라도 시나고그 앞은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비들이 철저하게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튀니지에서 유태인이나 타 종교에 관대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초대 대통령인 부르기바도 프랑스에서 공부한 유럽파이니 강력하게 이슬람을 강요하지는 않고 있는것 같다. 또한 관광으로 큰 수입을 얻고 있고 더욱 중요해지는 입장에서 상징적인 의미라도 유태인의 거주가 중요하게 판단될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폭탄테러로 튀니지의 관광산업은 한동안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유럽에 개방정책을 취하고 FTA를 하고 있는 튀니지에서의 유태인들은 2천년을 살아온 주민들이 아니라 단지 볼모로 잡혀있는 이방인일 뿐이다.
튀니지를 경험하면서 느낀 이슬람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튀니지란 나라가 유구한 역사와 강력한 문명이 자리잡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슬람으로 단합된 힘이 더 크다고 생각됐다. 그래서 프랑스가 80년을 지배했어도 카톨릭이 파고들지 못한것 같다. 지금도 튀니지를 비롯 아랍권에 각종 단체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지만 법으로 막을 뿐 아니라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 먼저 것을 개선한 더 좋은 것이라는 간단한 논리로 쉽게 물리친다. 오히려 전세계에 이슬람교인의 인구는 이주자들에 의해서 급격하게 늘고 있다.
마트마타의 산속에서 이슬람을 피해 도주한 기독교인들의 이야기와 십계를 상징하는 손바닥 두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보았을때 이들에게는 기독교가 오히려 무속신앙이고 전설과 같은 낡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지방이나 도시나 할 것없이 어디를 가든 만나는 사람마다 이슬람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고 이슬람을 받아들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좋은 경치를 이야기 하면 알라의 증거라며 이슬람을 믿으라고 하고 나이 많은 노인들은 알라가 4명의 부인까지 허락한 이슬람을 믿으라며 자기 할아버지는 12명의 부인을 두었다고 이슬람의 축복을 받으라고 한다. 장난스런 젊은이들은 아랍어로 뭐라고 하고 따라하라고 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알라를 믿겠다는 서약이라고 한다.
이슬람은 현재 서양의 자본과 힘에 저항하는 작은 힘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강력하다. 오일머니를 통한 능력은 종교의 힘으로 뭉쳐서 폭력성까지 띄면서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혹자는 서방의 강력한 힘과 돈이 문제라고 하지만 그 부분은 생각의 차이인것 같다. 만약 서방에 돈과 힘이 없었다면 지금 전세계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전쟁중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문제가 가장 이슬람을 단결시키고 폭력적으로 만들었다는데 의의를 제기하진 않지만 그와 상관없이 언제나 이슬람은 전쟁을 했고 지금도 곳곳에서 전쟁중이다. 자신을 지키기위해 싸우는 것과 근본적으로 호전적인 기질과는 다른것이다.
또 순니파보다 강경한 시아파나 원리주의 탓이라고 돌리기도 하지만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다. 이슬람교는 기독교에서 출발한 종교이고 기본적으로 코란이 중심에 있다. 이슬람교가 무서운 것은 그들의 교리가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라 유일신을 믿는 단순하고 통일된 논리로 사람들을 단합시킨다는데 있다. 아침부터 아잔 소리에 깨어 하루를 시작하듯 이슬람교는 생각뿐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까지 지배하는 종교다.
현대에 와서도 종교를 위해서라면 돈뿐 아니라 목숨도 내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 위험한것이다.
과거의 종교들이 모두 정치와 전쟁에 이용되었듯이 이슬람의 현대는 지금도 전쟁까지 불사하며 영역을 지키고 확장하려고 하고 있는것이다.
종교의 좋은점도 인정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상에서 종교가 없어지지 않는한 종교를 핑계로한 폭력과 전쟁은 없어지지 않을것 같다.